육지서 100㎞ 떨어진 ‘선물’같은 섬 속의 늪
목포항에서 2시간여 동안 쾌속선을 타고 흑산도로 갔다. 흑산도에서 다시 어선을 빌려 대장도라는 섬으로 향했다. 바로 이 섬 정상에 습지가 있다. 섬에 습지가 있다는 사실은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일이어서 이미 학계에서는 큰 관심을 받아왔다. 인간과 습지가 공생하며 공존하고 있는 장도습지를 찾았다.
최초의 섬 산지습지 … 멸종 동식물 서식 확인 ‘재발견’
1급수 수질·정화기능 탁월 … 탐방로·홍보관 설치 ‘예정’
춘란, 제비꽃, 호랑나비, 휘파람새, 동박새…. 어디선가 쉽게 만날 수 있는 낯익은 녀석들부터, 쉽게 만날 수 없기에 반가운 녀석들까지. 다양한 생명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향연들이 매일 밤낮으로 펼쳐지는 곳이 있다. 마치 대자연의 숨결이 느껴지는 장엄한 그 곳은 놀랍게도 섬이다. 육지에서 100㎞ 떨어진, 서해 최남단에 위치한 대장도.
목포항에서 2시간여 동안 쾌속선을 타고 흑산도에 이르면 다시 흑산도 어항 맞은편 비리항에서 어선을 빌려 타고 20여분을 더 가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다. 흑산도와 홍도 사이에 있는 대장도는 교통이 불편한 탓에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섬이다.
그런 이곳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3년, 조류보호협회원들이 이곳에서 습지를 발견한 이후부터다. 그러면서 환경부가 2004년 대장도 섬 일대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이후 2005년 국제습지조약인 람사르습지에 등록하게 됐다.
◆정기항로 없어 탐방 쉽지 않아
타고온 어선에서 내리자, 포구 위 언덕엔 가옥 50여 가구가 옹기종기 앉아 있다. 마을을 지나 섬 남동쪽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대장도의 맨 꼭대기가 해발 273m에 지나지 않지만 장도습지로 가는 길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매우 가파른데다 어른 키를 훌쩍 넘길만큼 무성한 풀숲을 헤치는 것도 버거운데 가시나무 덤불 때문에 걸려넘어지기 일쑤다. 그러다 뱀이 지나가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검지손가락 크기의 도마뱀을 발견할 땐 신기롭기까지 했다.
땀방울이 비오듯 쏟아지고 몇 번을 미끄러지면서 1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한 습지는 마치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으로 공간이동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줄 만큼 근사했다.
능선과 능선 사이로 저지대가 펼쳐진 모양새가 마치 숟가락 모양 같다. 육지에서 100㎞ 가량 멀리 떨어진 섬에서 ‘원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장도습지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선물’같은 풍경을 던져주는 듯 했다.
이처럼 장도습지는 국내에선 최초로 도서지역에서 발견된 산지습지다. 게다가 다른 내륙습지와 달리 양쪽 봉우리 사이에 움푹 패인 습지가 형성돼 있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이탄층 발달, 멸종동식물 발견
“자, 이쪽으로 와 봐요. 여기서부터 2만7000평(9만여㎡)이 다 습지에요. 발이 푹 빠질 것 같지만 절대 안 빠져요. 이탄층(물에 의해 식물체가 썩지 않은 채 퇴적된 곳)이 다른 곳보다 두꺼워서 스펀지처럼 출렁출렁하기만 하거든요.”
장도습지해설사 김창식씨는 습지로 성큼성큼 들어가 두 발로 땅을 굴러댔다. 실제로 습지를 밟아보면 쿠션감이 느껴질 정도다. 바로 이탄층이라는 독특한 토양 때문에 장도습지가 스펀지와 같이 물을 다량으로 보유할 수 있는 이유다.
긴 가뭄 탓에 남쪽의 습지는 다소 메말라 있었지만 북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룬 곳에선 이탄층이 발달됐다. 실제로 장도습지의 이탄층은 두께가 80~90㎝로 다른 습지보다 3~4배 가량 두꺼운 것으로 알려졌다.
낯선 이의 발소리에 놀랐는지, 엄지손가락만한 민달팽이는 분홍빛 살갗을 반짝이며 얼굴을 내밀고 개구리들은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물이 흐르는 곳에 돌을 들춰보니 1급수에서만 서식한다는 검지손가락만한 크기의 가재를 비롯해 옆새우·플라나리아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식물도 다양했다. 울창한 숲 속에는 20㎝ 가량의 천남성이 곳곳에 서식하고 있었다. 습지탐방에 함께 나선 오장철 장도교회 목사는 “조선시대때 흑산도가 유배지로 활용됐는데, 이때 사약을 쓰기 위해 독성이 강한 천남성을 대장도 일대에 식재한 것”이라고 일러줬다.
또 바위에 붙어 자라는 콩짜개덩굴이라든지,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다는 보리밥나무, 그리고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냉대식물인 곰취를 이곳에선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현재 장도습지에서는 멸종위기종인 수달과 매를 비롯해 보호야생종인 솔개·황조롱이 등 야생동물 205종과 보춘화(춘란) 등 습지식물 294종, 후박나무군락 등 26개의 식물군락이 발견되고 있다.
◆물 매개로 인간·자연 ‘공생’
이곳 장도에는 집집마다 물탱크가 설치돼 있는 만큼 물이 풍부하다. 대부분의 섬 지역은 물이 부족하기 마련이지만 흑산도 주변 296개 섬 가운데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식수 걱정을 하지 않는 섬이다.
습지의 물은 수자원 저장 및 수질정화기능이 뛰어나 수질과 자연생태도 모두 1등급을 유지하고 있어 여기서 흘러내린 물은 섬 사람들의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장도 사람들은 ‘습지의 사막화’를 방지하기 위해 습지의 물을 직접 끌어다 쓰지 않고 집수정에 받아서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장도습지가 물이 풍부한 이유는 바로 운무(雲霧) 때문이다. 연평균 강수량이 1100㎜에 불과하지만 1년 중 절반 가량이 바다안개가 휩싸여 있어 장도습지의 물길을 공급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오 목사는 “여기에 장도습지를 지나는 ‘바람길’을 통해 바다의 습기와 구름, 비가 내려 수분을 공급해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장도습지를 찾아가기란 여간 쉽지 않다. 배를 타고 들어와야 한다는 점과 우거진 수풀림 때문에 불편하기 이를데 없다. 본지 취재팀이 오기 전에 경기과학고 교사들이 학술연구목적으로 방문하는 등 한해 평균 20여팀이 다녀갈 정도다. 신안군은 올 가을께부터 장도습지 일대에 탐방목책로를 설치하고 홍보관을 건립키로 하는 등 습지 홍보에 적극 나설 계획이다.
습지해설사 김씨는 “장도습지는 소규모 섬에서 발견된 최초의 습지일 뿐 아니라 이례적으로 산 정상부와 가까운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식물종이 다양해 보전 가치가 뛰어난 습지”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장도습지의 풍부한 물은 다양한 동식물 뿐만 아니라 사람들마저 이곳 섬에 머무르게 했다. 섬을 떠나오면서 장도습지의 주인은 어쩌면 인간이 아니라 수달과 가재, 도마뱀,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식물들이지 않을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양상용·조상현 記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