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순 교수(순천향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오랜만에 다시 월드컵 우승을 했지만, 독일 사회는 매우 조용하고 차분하게 일상으로 돌아가 승리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국가로서 독일의 우월감을 내세우기 보다는 독일 축구대표팀의 과학적 훈련과 치밀한 준비 그리고 조직력을 강조하고 있다. 4강에 올라 온통 나라가 들썪이고 감격했던 2002년 한국과는 너무나 다른 반응이었다.

필자가 독일에 머물면서 한국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 중 또 하나가 있다. 교통법규에 관한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보행자 신호등을 거의 지키지 않는다.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 불이라 하더라도 지나가는 차가 없으면 대부분 거리낌 없이 건너간다. 대신 운전할 때는 비교적 철저하게 신호와 속도를 지킨다. 도로 상에서 법규를 위반해 다른 운전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운전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도 독일 운전자들이 스페인 운전자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스페인에서 2주간 자동차 여행을 하며 내린 결론이다. 차선위반이나 끼어들기를 하는 운전자를 보지 못했다. 도심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교차로가 로타리 방식으로 신호등이 없지만 막히는 법이 없다. 로타리에 들어가고 나오는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페인 보행자들 역시 신호등은 지키질 않는다. 빨간불이라 하더라도 차가 없으면 거리낌 없이 지나간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정 반대이다. 보행자로서 횡단보도 신호등은 거의 모두 잘 지키지만, 운전대를 잡으면 신호위반, 속도위반, 차선위반이 다반사이다. 왜 그럴까?

윤리적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체면이 중시되는 한국 사회에 중요한 윤리적 기준은 “남들”이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반대로 주위사람들이 용인하거나 눈감아주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질 않는다. 보행자 신호에서는 주위 여러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지만, 자동차 운전자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박근혜 정부 새 내각의 인사청문회를 거치면서 또다시 사회지도층의 윤리적 자질이 여론의도마위에 올랐다. 전관예우, 논문표절과 대필, 부동산 불법거래 등 이제는 익숙해진 고위층의 비윤리적 행위들이다. 총리와 장관후보 인물난에 빠지자, 청문회 기준이 너무 엄격해 통과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우려도 나왔다.

사실 해방 후 한국사회는 윤리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생존경쟁을 당연시 하던 사회에서 윤리와 법을 지킨 사람들은 도태되거나 낙오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취한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사회였다. “바른 생활”이 초등교과목이었지만 부모나 학교가 청소년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바른 생활 보다는 “남보다 혹은 남들만큼” 잘 사는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옳고 그른 것의 기준이 모호해졌고, 그런 것을 따지는 사람들이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기업가들은 관료들과 밀착하고 판검사들은 전관예우로 졸지에 부자가 되어도, 교수들은 학생들을 착취하고 표절해서 학자의 명예를 누려도,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관행이라며 우겨댔다. 오히려 자기들보다 더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비난을 받지 않는다며 억울하다고 주장하기 까지 한다.

인간에게 윤리가 필요한 것은 다른 인간이나 동물 혹은 식물과 함께 살기 때문이다. 혼자사는 인간에겐 신호등이 필요없다. 그러나 주변사람들 때문에 인간의 윤리적 판단이 왜곡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남들도 그렇게 한다”는 구실로 많은 윤리적 기준을 희석시키거나 무시했다.

한국사회만 집단적으로 윤리적 의식이 마비된 것은 아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인들은 600만명에 가까운 유태인과 외국인을 학살하는데 동조했다. “게르만”이라는 민족국가 집단을 강조한 히틀러에게 세뇌된 독일인들의 광기가 천인공노할 반인륜적 행위를 정당화시킨 것이다. 독일인들이 월드컵 우승을 국가적으로 과시하지 않고, 하나의 스포츠행사로서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사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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