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마자 선교사 부부

본지는 일제의 강제합병이 이루어졌던 20세기 초, 호남의 청소년들과 성인들을 깨우치고 교육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타마자(John Van Nest Talmage) 선교사의 삶을 조명해 보고 그 의미를 되돌아보는 기획특집 ‘담양지역 최초 선교사 타마자의 삶’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본 기사는 손순용 전남도립대 겸임교수의 ‘호남초기선교사 타마자의 삶’에 대한 연구논문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으로 담양지역의 기독교 전파와 선교 흔적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편집자)


프롤로그


다문화를 논하면 우선은 동남아시아에서 우리나라 남성에게 시집온 주부들을 떠 올리게 된다. 그러나 좀 더 넓게 생각해 본다면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를 찾아와 복음과 교육, 의술을 전하였던 선교사들이 다문화 전파의 시초였음을 알 수 있다.

광주광역시 남구 호남신학대학교의 남쪽 동산에는 갓 결혼한 27세의 신혼으로 척박한 조선 땅을 밟았던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를 비롯한 22기의 선교사 묘비가 있다. 이 묘소 중에는 매우 오래 되어 보이는 타마자 선교사의 장모인 에머슨(Amelia Janet Emerson, 1860-1927) 여사의 묘비가 있다. 이 묘비에는 “영혼이 살아서 예수와 더불어 왕노릇 하느니라”라는 성경 말씀이 새겨져 있는데, 90여년의 세월이 흘러 글씨가 닳아져서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됐다.

다문화시대를 맞이하여,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을 사회복지적 관점에서 조명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호남의 경우 외국 선교사들의 의료와 교육에 대한 지원으로, 여성과 아동의 인권이 향상되었으며,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인식과 그들의 삶을 바꾼 의료복지가 이루어졌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용교 교수는, 호남지역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사회복지를 개척한 인물로 15명을 선정했다. 즉 1904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현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서 선교와 복지의 씨앗을 뿌린 유진 벨(배유지), 의료를 통해 복지를 실천한 윌슨(우월순), 간호와 복지의 선구자 쉐핑(서서평), 교육과 복지를 개척한 루트(유화례), 농촌개발의 개척자 어비슨, 의료복지를 실천한 헨리 선교사 등이 초기 개척자다.

이들과 협력하면서 당시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사회적 약자인 한센병자, 결핵환자, 정신질환자, 부랑인, 그리고 전쟁고아를 위한 복지를 실천한 최흥종, 손양원, 강순명, 이현필, 김준호, 이준묵, 박순이 등과 여성운동과 교육을 실천한 김필례, 조아라 등이다.

결국, 조선시대의 외국 선교사들 그리고 선교사들과 협력한 사람들로 인해 다문화적 복지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 개신교의 호남 선교 역사


우리나라의 개신교 선교 역사는 1884년 9월 의료 선교사 알렌의 입국으로부터 시작됐으며, 알렌은 1885년 4월 광혜원(제중원으로 개칭)이라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설립했다. 교육선교의 경우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입국으로 본격화됐다고 할 수 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 항구에 내린 두 선교사는. 이수정이 일본에서 번역한 한글성경 ‘마가복음’을 갖고 있었다. 이수정은 온건개화파 양반학자로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기독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으며 1886년 5월 귀국해 은거하다가 병사했다.

학교를 통한 교육선교를 살펴보면, 아펜젤러는 1886년 6월 2명의 학생을 데리고 배재학당을 시작했으며, 언더우드는 1886년 5월 ‘언더우드학당’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고아원 학교를 세웠고, 이 학교는 1905년 경신학당으로 개칭됐다.

한국에 내한한 선교사들은 선교지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선교지 분할협정을 체결했는데, 서울·경기·충청·강원 등 중부지역은 美감리회·남감리회와 美북장로회·남장로회가 중복을 피해 분할했고, 평안도·황해도는 북장로회와 美감리회. 함경도는 캐나다장로회, 경북지역은 북장로회, 경남은 호주장로회, 전라도는 남장로회가 주도적으로 선교를 담당했다. 따라서 호남지역의 선교사들은 미국 남장로회 소속이었으며 보수적 성격을 지닌 신앙으로 자리매김했다.

내한한 선교사들은 교파에 따라 조금씩 다른 신앙적·교리적 배경이 있었지만 대체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네비어스(J.L.Nevius)의 선교정책을 따랐는데 이는 ‘독립하고 자립하며 진취적인 토착교회’의 설립을 목적으로 했다.

호남지역 선교는 1895년 한국에 들어와 나주, 목포, 광주에 선교부를 세우고 30년간 복음의 씨를 뿌렸던 유진 벨(Eugene Bell, 한국명 배유지裵裕祉, 1868-1925) 선교사의 헌신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선교하는 동안 첫 아내는 심장병으로 두 번째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었으나, 이에 좌절하지 않고 의료·교육·복지사업에 헌신했다.

유진 벨 선교사는 목포 선교부에서 1903년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를, 광주선교부에서는 1907년 남자들을 위한 숭일학교와 수피아 여학교를 설립·운영했다. 유진 벨 선교사는 1925년 9월 28일, 5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으며 호남신학대학교 묘지에 안장됐다.

한편 타마자 선교사는 1910년 가을에 광주에 도착해 광주선교부를 중심으로 담양, 장성, 송정리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일제 말기에 선교부 재정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38년 이후에는 동료 선교사들이 귀국하는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광주에 남아 선교부 재산을 지켰고 이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또한 다른 선교사와는 달리 담양지역의 폐가를 인수해 집을 짓고 살았으며, 순담성경학원을 만들어 목사를 양성했다. 또한 담시 담양의 소학교인 광덕학교에 다양한 후원을 해 어린 학생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해 알려주는 교육자로서의 역할도 감당했다.

 

2. 타마자 선교사 선친들의 삶


타마자 선교사의 할아버지 존 벤 네스트 탤메이지 1세(John Van Nest TalmageⅠ)는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중국 선교를 담당하셨던 지성인이었다. 탤메이지 1세는 1848년에 뉴저지 네델란드 개혁파 교회와 연계해 중국 아모이(Amoy)에 선교사로 가서 40년간 중국에 머무르며 선교활동을 했다. 그는 성경의 일부를 중국어로 번역했으며, 중국의 독립을 지지했다. 그의 딸들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중국에 가서 평생을 선교사로 살았다.

타마자 선교사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이어 받았으며, 할아버지가 돌아 가셨을 때 그분이 모아둔 오래된 중국 우표를 물려받았다. 타마자 선교사 역시 우표 수집이 취미였으며 일제에 의해 한국에서 미국으로 추방될 때 한 가방에는 선교부 재산증서를, 다른 한 가방에는 지금까지 수집한 우표를 넣어 갈 정도로 우표 수집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타마자 선교사의 아버지 존(John Sandeman Talmage)과 어머니 마리엘라(Mariella Crane Talmage)는 뉴올리언즈에서 여섯 자녀를 키우며 쌀장사로 성공을 했다. 그러나 쌀장사에 관심이 없었던 타마자는 자신의 이름을 물려준 할아버지의 뜻을 따라 결국 신학대학에 입학했고 선교사의 길을 걸었다.

타마자 선교사의 장모인 아멜리아 재닛 에머슨(Amelia Janet Emerson)은 사위와 외동딸을 따라 한국으로 왔다. 장인인 프레드 에머슨(Fred Emerson)은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다. 당시 체구가 작고 연약한 할머니에 대해 의사는 여행 도중 돌아가실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이 곳에 홀로 남느니 가다가 죽는 편이 낫다”며 한국으로 왔다고 한다. 에머슨 여사는 한국에서 16년 동안 선교구의 모든 아이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타마자 선교사 부부의 바쁜 선교 일정 속에 7남매를 키우셨다. 그분의 묘소는 호남신학대학교 선교사 묘지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다.

 
3. 타마자 선교사의 삶


배유지 선교사의 흔적이 목포를 비롯한 광주, 나주, 담양 등 호남 전역에 스며있다면, 타마자 선교사의 흔적은 주로 담양과 광주를 중심으로 찾아볼 수 있다.

타마자 선교사는 1884년 12월 30일 뉴저지주 뉴왁(Newark)에서 출생했다. 1907년 툴레인 대학(Tulane University)에서 공학사(전기 및 기계공학) 학위를 취득하고 1909년 사우스웨스턴 장로교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910년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1년의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타마자 선교사는 1910년 3월 8일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의해서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을 하도록 임명됐다. 1910년 7월은 이 젊은이에게 매우 분주한 달이었다. 그는 7월 15일 뉴올리안즈 노회에서 미국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으며, 3일 후 엘리사 데이 에머슨(Eliza Day Emerson)과 뉴올리언즈 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7월 26일 그와 신부는 SS Asis 호를 타고 센프란시스코에서 아시아로 출항했다. 타마자 부부는 한일합병(1910. 8. 29.) 3일 전인 1910년 8월 26일 조선 땅에 도착했으며, 한일합병 시기의 질고를 직접 몸으로 겪으며 선교사역을 이어가게 된다.

타마자 선교사의 사역은 1910년부터 1942년까지 계속됐고 그 후 3년 기간의 사역(1947-1950)과 1954년 이른 봄부터 시작해 약 2년간 마지막 사역으로 이어진다.

타마자 선교사는 한일합병이 된 해인 1910년부터 1942년까지 32년 동안 광주선교부를 중심으로 담양, 장성, 송정리 등 전남지역 선교활동을 했다. 1912년 유진 벨 선교사가 일시 미국에 귀국함으로써 배유지 선교사의 당회장 구역인 24개 교회를 맡게 됐다.

1915년 31세의 나이로 광주 숭일학교 제3대 교장으로 취임한 타마자 선교사는 축구는 물론 야구, 정구, 농구 등 많은 운동을 소개했으며 ‘신체가 건강해야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학생들을 훈육했다.

이후 타마자 선교사는 그의 핵심 선교구역이었던 담양 미리산에 자신의 집을 건축하고 더불어 그 곳에 순담성경학원를 개설해 젊은이들에게 복음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당시의 순담성경학원 자리에는 현재 담양군 공공도서관이 위치하고 있으며 어린 학생으로부터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배움과 학문의 터전이 되었다. 타마자 선교사는 비가 올 때는 인력거 대신 비닐 옷을 입고 다녔으며, 순담성경학원을 운영하면서 담양 및 곡성 등지를 순회할 때도 자가용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녀 자전거 선교사라는 별명도 얻었다고 한다.

1937년 호남에 있는 미션학교가 일제에 의해 모두 폐쇄당하면서 일부 선교사는 강체 출국에 응했으나 타마자 선교사는 선교부의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재단법인을 설립하는 등 기독교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타마자 선교사는 옥과 출신 조용택 전도사와 함께 7년간의 공을 들인 끝에 1930년 전남노회 재단법인의 설립을 허가 받았는데 이를 통해 선교부 내 200여개의 흩어진 부동산을 재단으로 옮길 수가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1941. 12. 7) 이후 일본은 갖은 명목으로 미국 선교사들을 억류했다. 적대국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타마자 선교사는 1941년 12월 8일부터 1942년 4월 9일까지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당시 죄목은 ①권총 소지 ②단파라디오 청취 ③지도제작 등이었다. 결국 121일 간의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석방됐으며 1942년 6월 1일 강제 출국하게 된다.이 기간 동안에 겪은 경험이 ‘한국 땅에서 예수의 종이 된 사람 A Prisoner of Jesus Christ in Korea’)을 기록하게 된 배경이다.

식민정부가 타마자 선교사에게 관심을 보인 특별한 이유는 법인 이사장 자격을 가진 타마자 선교사를 협박해 전라남도의 모든 선교부 재산을 일본으로 넘기게 하려는 시도였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선교사를 축출하지 못하고 구금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며 이는 한국교회와 민족을 사랑한 타마자 선교사의 충성된 선교의 결과라 여겨진다. 타마자 선교사는 1955년 65세의 나이로 45년간의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귀국했으며 부인과 같이 조지아 주 애틀란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4년 향년 80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다음호는 타마자 선교사의 담양지역 선교 흔적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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