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마자선교사의 담양가옥(현 담양공공도서관 자리)

본지는 일제의 강제합병이 이루어졌던 20세기 초, 호남의 청소년들과 성인들을 깨우치고 교육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타마자(John Van Nest Talmage) 선교사의 삶을 조명해 보고 그 의미를 되돌아보는 기획특집 ‘담양지역 최초 선교사 타마자의 삶’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본 기사는 손순용 전남도립대 겸임교수의 ‘호남초기선교사 타마자의 삶’에 대한 연구논문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으로 담양지역의 기독교 전파와 선교 흔적 등을 살펴보고자 마련했다.(편집자)


1. 담양의 교회


담양에서 설립이 오래된 교회역사 속에서는 배유지 선교사와 타마자 선교사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담양지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교회는 무정교회다(112년의 역사). 무정교회는 1904년 초대교역자 이교수 장로와 배유지 선교사가 무정면 오룡리에 거처를 마련해 교회를 설립했으며 이후 타마자 선교사가 선교 및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교인들에게 세례를 거행했다.

개동교회는 1906년 3월 10일 전남노회의 허락을 받아 설립됐으며, 유진 벨 선교사는 노응표 조사를 제1대 교역자로 보냈다. 이후 타마자 선교사는 광주 양림동 수피아학교 근처 사택에서 당회장 역할을 하며 전도에 나섰다.

양지교회는 1910년 유진 벨 목사의 봄철 순회 중 설립됐으며, 유진 벨 선교사가 1912년 1월 18일 안식년을 맞이해 미국으로 떠난 후 1910년 8월 광주에 도착한 타마자 선교사가 양지교회를 비롯한 담양, 순창지역 교회를 담당했다.

타마자 선교사는 1910년대 초반 양지교회 내 담양 신문화 운동의 본산인 순담성경학원을 설립 운영했는데, 1회에서 3회까지는 양지교회에서 운영하다가 4회부터 미리산(현 담양군 공공도서관 자리)으로 이전 운영했다.

담양읍교회는 1917년 4월 1일 타마자 선교사와 조하파(趙夏播) 및 서서평 등이 담양읍 기도처를 설립함으로써 출발됐는데 본래 교회가 위치한 지역이 조선시대 담양현에 딸린 객사가 있던 곳이라 해서 ‘객사리교회’라고 불렸다. 1918년 일제의 토지조사 후 담양읍 지역주민과 타마자 목사가 객사터를 매입해 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설립이 90년 이상 된 교회에서는 모두 타마자 선교사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2. 순담성경학원


전북 순창과 전남 담양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가까운 지역이다. 타마자 선교사는 담양의 폐가를 구입하여 순담성경학원으로 활용했다. 초기 순담성경학원은 양지교회에서 출발해 1회~3회까지 운영됐으나 4회부터는 미리산(현 담양도서관 자리)으로 이전해 운영했다.

타마자 선교사의 수제자인 원창권 목사(한가족 4인 순교)가 순담성경학원의 교사로 활동했으며 대표 졸업생으로는 배영환 장로, 강치원 목사(강신석 목사 부친), 박요한 목사(합동측 총회장 역임) 등이 있다.

당시 순담성경학원은 담양 지방 젊은이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는 산실이자 미국의 신문화를 전파하는 문화의 전달 장소 역할을 수행했다. 순담성경학교는 담양지역민은 물론 인근 순창지역민들이 참여해 성경공부와 함께 영어, 피아노, 오르간을 배우고 축음기를 통해 음악을 들었으며 특히 담양, 순창 지역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곳이었다.

순담성경학원에서 교육을 받았던 박요한 목사는 순담성경학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순담성경학원 초기에는 담양군 봉산면 양지리의 양지교회 예배당을 학교로 사용했다. 타마자 선교사는 미국에서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신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다음 곧 바로 선교사를 지원해 한국에 왔다. 당시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들은 주로 광주, 목포, 순천, 전주 등 도시의 경관이 좋고 살기에 편리한 곳에 집단을 이루어 살았다. 그러나 타마자 선교사는 이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한 방식의 선교활동이 인상적인데, 그는 담양읍 백동리 미리산 기슭에 동산을 매입해 주택을 짓고 살았다. 현장 속에서 살아가는 현장의 선교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순담성경학원에는 성경을 비롯해 성경개론, 설교학, 구약사기, 교회사, 조직신학, 영어, 개인전도학 등 요즘 신학대학에서 볼 수 있는 과목을 지도했다. 강사진은 타마자 목사 내외, 원창근 목사, 허화준 목사, 양동혁 목사, 박동환 장로, 유기섭 목사 등이었다.

순담성경학원은 3년 과정으로, 학생 대부분이 근로장학생이었으며 수업시간 이외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함으로써 학비를 면제 받았다. 타마자 선교사는 학생들을 가르쳐 전도사로 배출하되 철저한 자립정신으로 농촌교회의 부흥을 꾀하고자 했으며, 학생들에게 근로장학제도를 도입해 지도했다.

제1회 졸업생으로는 배길수, 노덕양, 양동석, 제2회 졸업생으로는 박요한, 김재구, 김만제 등 세 사람이었다. 1회 졸업생인 배길수(배영환)는 양지교회 장로가 됐다. 미국 남장로교의 타마자 선교사는 철저한 보수정통 신앙인이었으며 그의 감화와 영향 아래 제 1대와 제 2대 목회자 신학자들이 배출돼 한국의 보수 신학을 이끌어 갔다.

타마자 선교사는 담양군 봉산면 양지리에 수 만 평의 황무지를 사들였다. 대부분 모래로 뒤덮여 아무 쓸모없는 땅이었으나, 이곳에 성경학교를 세우고 학생 전원이 근로장학생으로 이 황무지를 개간했다. 날마다 지게를 지고 모래를 져 날라 제방을 쌓아 홍수로 인한 수해를 예방했으며 학생들이 스스로 일해서 학비를 충당하는 자립정신을 심어 주었다.

타마자 선교사는 ‘타 깍쟁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근검절약했지만 전도하는 일에는 정반대였다. 학생들에게는 전도용으로 자전거 한 대씩을 사주었는데 그 당시에는 자전거를 마련한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도시에서 웬만한 일본인도 자전거 갖기가 쉽지 않던 때였는데 학생들에게 자전거는 경이로움이었으며 자부심이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가장 현실적인 증거물이었던 것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자동차를 타고 다녔지만 타마자 선교사는 고무신에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근검절약하며 자신을 엄격히 다스리는 마음자세를 선교일념으로 삼았다.


3. 광덕학교와 교육복지


당시 담양읍교회를 시무했던 허화준 목사는 철저한 경건생활로 주일성수와 십일조 생활을 하게 했고 광덕학교를 세워 배우지 못한 소년들을 모아 성경과 일반 교과목을 가르치는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타마자 선교사의 행적은 당시 신문에도 잘 나와 있는데, 본인은 조밥과 맥반을 먹으면서라도 아동의 교육을 위해 광덕학교(담양읍 백동리 254번지, 초등 3년 과정)에 토지 800평과 현금 천원(당시 광주읍 서방면 토지 평당 가격이 6.5원으로 약 6,500평 정도)을 기부했다. 또한 동아일보 1935년 8월 13일자에 실린 타마자 선교사 25주년 기념 축하식 기사를 보면 본인이 세운 30여 처 교회가 연합으로 담양읍교회 예배당에서 축하예배를 드렸는데, 무상아동교육기관 6곳과 학비를 대준 학생이 30여명이나 됐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던 중 1937년 9월 6일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선교부 산하 10개 학교 가운데 광주의 숭일, 수피아, 목포의 정명, 영흥, 순천의 매산, 담양의 광덕학교를 폐쇄했다. 이후 일부학교는 개교가 되었으나 광덕학교는 개교하지 못했다.

 
4. 옥과교회 조용택 전도사


타마자 선교사의 사역은 옥과교회 조용택 전도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먼저 옥과교회의 이수정 순교자는 전라도 옥과현에서 이병규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온건개화파 양반 학자였는데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으며 일본의 기독교 학자인 쓰다센을 만나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연구 하던 중 1883년 4월 29일 일본에서 세례를 받았다.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첫 한국인 개신교 신자가 된 이수정은 이후 마가복음을 우리말로 번역했는데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이 복음서를 들고 우리나라에 입국했다. 한국개신교 선교의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이수정은 갑신정변 실패 이후 정부의 노여움을 샀고, 개화당의 김옥균과도 사이가 나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으나 1886년 귀국 즉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용택 전도사는 1902년 옥과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타마자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하던 고모 조덕화의 전도를 통해 25세 때 예수를 믿게 되었다. 타마자 선교사는 조용택의 신앙을 보고 선교부에서 함께 일할 것을 권유했고 그는 타마자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순창과 담양지방의 교회를 순회하며 선교 일을 담당했다. 조용택 전도사는 타마자 선교사의 중매로 결혼을 했으며 타마자 선교사의 권유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루고 6.25때는 유화례 선교사를 피난시키는 등 선교부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했는데 1950년 9월 29일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고 말았다.

타마자 선교사는 1930년 전남노회 재단법인 설립의 공로를 조용택 전도사에게 돌리고 있는데 “미스터 조가 없었다면 노회재단의 설립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선교회의 많은 돈을 관리하면서도 물질의 유혹을 받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조용택 전도사 가문은 2대에 걸쳐 타마자 선교사와 선교의 길을 이어갔으며 이러한 신앙은 전남과학대학과 남부대학교의 우암학원 설립자 조용기 이사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타마자 선교사가 거주하였던 현 담양공공도서관과 옥과교회의 거리는 약 14킬로미터 정도이며 당시에는 자전거로 가능한 거리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담양공공도서관에서 옥과교회 이수정 기념관까지의 자전거 도로가 생기면 담양지역을 찾는 종교 관광객들에게 의미있는 순례길이 되리라 여겨진다.


5. 자녀들의 삶


그동안 한국에서 출생했던 타마자의 자녀 7남매는 장성해 부모가 다 이루지 못했던 선교사역을 이어갔는데 특히 2남인 에드워드(John Edward, 타요한) 선교사는 대전대학(현 한남대학교) 제2대 학장으로 재직했으며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부 총무직을 맡기도 했다.

타마자 선교사의 막내 딸인 마리엘라 탤메이지 프로보스트(Mariella Talmage Provost) 여사는 한국과는 친밀한 존재다. 1923년 2월 광주에서 태어난 마리엘라 선교사(한국명 부마리아)는 광주 선교부와 담양 미리산의 집에서 성장했으며 당시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평양외국인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노스케롤라이나 샬럿에 있는 퀸즈대학에서 간호학을 마치고, 남장로교 총회에서 약 1년 과정의 선교사 교육을 받은 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타마자 선교사의 넷째 자녀인 친언니 재닛과 함께 전주예수병원에서 간호 선교사로 일했으며 한국에서 선교 중인 레이몬드 프로보스트(Raymond Provost, 한국명 부례문) 선교사와 결혼했다. 이 부부는 경동노회를 통해 문화학원을 인수해 부례문 선교사는 초대 교장을 역임했으며 경주 문화중고등학교 설립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을 마친 후에도 ‘한국장학재단’을 만들어 빈곤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1997년 소천한 부례문 선교사의 묘소는 경주 문화중고등학교 후원에 있다.

부례문 선교사의 소천 후 부마리아 선교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블랙마운틴 도시에서 수많은 방문객과 한국 출신 선교사들을 이어 주는 가교역할을 역동적으로 감당했다. 또한 아프리카 말라위의 시골 응코마에 세워진 에벤에셀 학교를 후원하는 데도 열정을 다하는데 부마리아 선교사의 2남2녀 자녀들(데이빗, 조나단, 앤, 재닛) 역시 이 학교를 돕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부마리아 선교사는 2014년 4월 15일 91세의 일기로 소천했으며, 블랙마운틴 장로교 교회의 벽에 설치된 납골당에 안치됐다. 남편인 부례문 선교사는 묘소가 한국에 있기 때문에 십자가 옆에 명패만 있는데 한국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부부의 모습을 기릴 수 있다.

타마자 선교사는 7명의 자녀(프렝클린, 존, 윌리엄, 재닛, 로이, 데이빗, 마리엘라)를 두었으며 22명의 손자를 두는 등 대 가족을 이루었다. 마리엘라의 모친인 엘리사 에머슨 선교사는 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 “I Gave You to the Lord(이 아이를 주님께 바치나이다)” 하고 기도했는데 이는 마리엘라 선교사 자서전의 책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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