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8월 군경합동작전으로 빨치산 600여명 토벌

▲ 가마골 전경. 6.25 격전지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처참했던 곳 중 하나가 가마골이다. 1950년 가을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던 전남ㆍ북 주둔 북한군 유격대 패잔병들이 이곳에 집결하여 은거하면서 약 5년 동안 유격전을 펼쳤다. 당시 유격대들은 이곳 가마골에 노령지구사령부(사령관 김병억, 장성 북하면 출신)를 세우고 3개 병단이 주둔하면서 낮이면 곳곳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민가로 내려와 살인, 약탈, 방화를 일삼았고, 전투가 장기화됨에 따라 병기시설인 탄약제조창과 군사학교, 인민학교, 정치보위학교 및 정미소까지 설치해 놓고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다가 육군 8사단, 11사단과 전남도경 합동작전에 의해 1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1955년 3월 완전히 섬멸됐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그날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가끔 탄피, 수류탄, 무기 제조에 쓰인 야철, 화덕 등이 발견되어 그 날의 참화를 말해주고 있고, 당시 사령관이 은거했던 곳으로 전해지는 사령관 계곡도 등산로를 따라가면 찾을 수 있다.

담양 용추봉 빨치산 토벌지는 1951년 8월25일 전남경찰연합부대·쌍치지구 전북경찰연합부대·전북 제18대대·순창경찰대 등이 600여명의 빨치산을 토벌해 큰 타격을 입힌 곳이다.당시 오전 6시 한국 경찰은 가마골을 중심으로 공격을 개시, 경찰의 공세와 26일 오후 아군 공군기의 폭격으로 빨치산들은 용추봉 북쪽 405고지로 내몰렸다.27일 오후 3시. 공군기의 지원을 받은 경찰부대는 405고지를 공격해 게릴라 114명을 사살하고 11명을 생포했다. 전투 당시 지형의 변화는 없고 가마골 빨치산사령관 계곡의 표지가 있으나 흔적은 보존되지 않아 위치를 찾기에는 어렵다.
이 기사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을 되돌아보고자 故 이해섭 담양군향토문화연구회장님께서 2007년도에 집필, 출간하신 ‘50년대 격동기의 진상’이라는 책자에 실린 자료를 발췌 인용했음을 밝혀둔다.(편집자)

전남도의 최북단이며 전남북도의 도계를 이루는 담양군 용면 가마골. 이곳은 백두대간 주맥에서 남서쪽으로 흘러나온 노령산맥의 지맥으로 6·25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을 비롯해 지방 좌익계열과 입산자들로 급조된 소위 게릴라전을 위한 빨치산의 거점전력 요충지다.

이곳 가마골에는 노령병단으로 지칭되는 기포여단, 가추샤, 번개 등 3개병단과 담양군당과 직할 유격대, 전남도당, 광주시당, 각시·군 유격대, 정읍군당, 순창유격대 등 약 3천여명이 주둔했으며 그중 완전무장 병력만도 8백여명에 달했다.

또한 광주, 함평, 나주, 목포, 무안군 등 일부 선이 두절된 시군당요원과 소수 무장부대가 가마골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에 잠복, 무분별한 학살과 약탈이 강행됐다. 이밖에도 가마골 일대에는 민간피난민 3천여 명이 공포와 허기에 지쳐 헤매다가 자수 등으로 빠져 나오기도 했으나 약 200여명의 민간피난민은 유격대에 편입 또는 합류하고 강제로 끌려다니며 소위 식량과 병기 장비 등의 운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험준한 산악과 울창한 밀림을 배경으로 천연적인 요새의 조건을 갖춘 노령산맥 일대를 장악했다. 군부대와 경찰전투부대는 수차에 걸쳐 토벌작전을 강행했으나 지리적 여건이 맞지 않아 소멸작전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군 당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시찰을 앞두고 세밀한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빨치산으로 가장한 정탐과 함께 육상정찰이 극비리에 시작되고 L9정찰기의 공중촬영이 밤낮없이 진행됐다. 드디어 1951년 8월 25일 오전 새벽 6시 대격전의 날이 밝았다. 공군 지원 아래 시작된 이 작전에는 전남경찰 연합부대 610명과 전북쌍치지구 전남북경찰연합부대 000명과 전북 18대 000명 순창경찰서 기동대 000명 군연합부대 000명이 투입돼 동서남북과 공중을 아우르는 입체적 작전이 전개됐다.

가마골을 중심으로 사방 30km지점을 목표로 전개된 이 작전은 피아간의 총소리와 저공으로 목표지점에 투하된 폭탄, 계속된 전투기의 엔진소리 등으로 노령산맥을 폭음과 진동으로 몰아 넣었다. 경찰부대와 군 작전 주력부대는 용추봉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압축했다.

1951년 8월 25일 오전 6시를 기해 시작된 작전은 이날 오후 3시경부터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곳곳에서 부상을 입은 경찰과 군인들이 들것에 실려 나온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특히 이때까지 하산하지 못한 피난민들이 뒤늦게 군·경의 호위를 받으며 산에서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들은 영양실조와 공포 속에서 살아온 탓인지 극도로 쇠약해진 모습이었다. 오후 6시가 지나자 산중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총성은 거의 멈추었으나 간혹 몇 발씩의 총성이 들려오고 중기관총의 위협사격과 함께 조명탄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위를 대낮처럼 밝혔다.

1951년 8월 26일 새벽4시 작전이 재개됐다. 이산 저산 고지에서 동시에 작전개시 신호탄이 오르고 피아간에 불이 붙었다. 동시에 시작된 총소리는 어제나 다름없이 콩 튀기는 듯 요란했다. 전날 압축한 포위망속의 목표지점에 집중사격이 시작된 것이다. 산발적인 격전이 벌어진 가운데 작전계획에 따라 공군의 맹렬한 폭격이 시작됐다. 폭격과 기총사격 등 무려 40분간의 줄기찬 아군의 공격에 이날 오후 7시에는 빨치산이 진지를 버리고 총퇴각을 개시하면서 용추봉 북방 405고지로 퇴각했다. 3일째로 접어든 27일 오후 3시 국군은 또다시 공군의 포격 지원하에 용추봉을 탈환했다.

이밖에도 담양경찰은 수십회에 걸쳐 출동을 계속해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도 적지 않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이때까지 담양경찰서의 전사자는 강영원 외 174명이다. 가마골 작전개요를 보면 1951년 8월 25일 오전 6시 작전 개시, 8월 26일 오후 2시 40분부터 40분동안 공군 폭격, 27일 오후 3시 공군폭격, 적 사살 320여명, 부상자 500여명, 군경피해는 전사 125명, 부상자 300여명이었다.

1951년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동안 실시된 담양·순창지구 토벌작전을 시찰하기 위해 1951년 8월 29일 정오 이승만 대통령이 헬리곱터편으로 담양에 왔다. 담양읍 관방제의 공설운동장(현 추성경기장)동편에 군 전용으로 설치된 임시 비행장에 내린 이 대통령은 현장에 마련된 군 지휘본부에서 작전상황을 보고 받았다. 이 자리에는 미8군 고위장성과 한국군 수뇌부등이 참석했다.


가마골 전투


노령산맥의 허리에 자리잡은 가마골은 남도의 젖줄인 영산강이 시작되는 곳이다. 기암괴석을 타고 폭포 아래 웅덩이를 이룬 용소를 시원지로 136km의 물결이 남도의 드넓은 곡창지대를 감아 든다. 해발 450m의 용추봉을 중심으로 울창한 숲이 원시림을 영상케 하는 이곳은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찾아드는 탐방객들이 사시사철 줄을 잇고 있다. 타고난 지리적 여건 때문에 가마골은 민족상잔의 아픔을 지켜보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당시 전·남북 피난민 3000여명과 노령병단(사령관 김병억) 소속 빨치산 1000여명이 이곳에 노령지구 사령부를 세우고 기포, 카추샤, 번개 등 3개 병단을 구성, 1955년 3월까지 육군 제8사단, 제11사단에 끈질긴 저항을 벌였다.(기포, 카추샤, 번개부대 일부는 1951년 4월 지리산으로 이동)

1951년 5월 빨치산과 육관 제8사단 소속 토벌대원 445명이 숨지고 800여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격전을 말없이 지켜보았던 가마골은 이 때문에 한때 피의 계곡으로 불리기도 했다. 담양군 용면에 위치한 이곳은 국민관광지로 지정되면서 야영장 등 편의시설이 들어서 심산유곡을 찾는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용추봉의 토벌작전


노령병단에는 별도로 전북기포, 카추샤, 번개 등의 여러 병단과 정읍, 순창유격대 양 600명(완전무장 400명)이 소속돼 있었으며 이들은 산이 험준하고 밀림이 울창하여 천연의 요충지로 지칭되는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주둔했다. 이곳은 전남과 전북간의 도계를 이루고 있으며 담양군 용면과 순창 복흥면과 군계를 형성하고 있다.

빨치산부대는 담양군 용면 용연리와 분통리 일대를 근거지로 칠보발전소의 송전선을 절단하고 복구공사를 방해하며 인근마을을 침해 약탈, 살인, 방화 등을 일삼았다. 그 피해가 심각해지자 이들을 섬멸코자 전남경찰연합부대 650명 및 쌍치지구 전남북경찰연합부대와 전북 18대대, 순창경찰부대의 연합부대는 공군 지원하에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개시했다.

1951년 8월 25일 오전 6시를 기하여 일제히 작전이 시작됐다. 용추봉과 가마골을 중심으로 견고한 포위망을 구축해 대기하다가 8월 26일 새벽 4시 미명에 행동을 개시해 포위망을 점차로 압축, 예정 진출지점에 진격 매복하자 이를 탐지한 적은 포위망을 탈출하고자 필사적인 돌파를 시도하면서 피아간에 치열한 공방이 전개되고 전투는 극에 달했다.

8월 26일 오후 2시 40분 예정된 작전계획에 의해 우리 공군 전투대는 40분간 용추봉과 가마골 일대에 포탄을 쏟아 부었다.

적은 앞을 다투어 밀림 속으로 도주했다. 아군은 틈새도 주지 않고 계속 추격하자 적은 담양군 금성면 방면으로 도주하고자 중화기를 미친 듯이 난사하는 한편 필사의 저항을 계속했으나 끝내는 이날 오후 7시경에 기성진지를 버리고 총 퇴각을 시작해 용추봉 북방 405고지로 이동 집결했다. 8월 27일 오후 3시 우리부대는 다시 공군의 대대적인 폭격 지원하에 405고지를 점령하자 적의 진지는 모두 파괴되고 잔당은 도주했다. 이 전투에서 적은 114명이 폭살 및 사살 됐으며 11명이 생포됐다, 또 쌀 65포와 의류 80점을 노획했다. 아군피해는 전사 9명, 부상 8명이다.


1950~1957년까지의 토벌 전과


6·25전쟁으로 일시 후퇴했다가 수북된 후 경찰과 청년방위대와 우익단체에서 담당했던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이 1950년 10월 10일을 기해 육군 제 11사단으로 이관되자 10월 13일자로 각 시군에 파견된 미군이 철수하고 10월 15일 육군 제11사단 20연대가 담양을 비롯해 일부 시군에 주둔해 공비소탕에 나섰다.

당시 전남도사에 따르면 전남도내 잔존 폭도는 인민군, 치안대, 내무서원, 유격대를 포함해 5만7000여명이고 그중 무장부대는 1만2000여명으로 야포, 박격포, 기관총, 다발총,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비무장부대는 4만5000여명으로 죽창, 철창, 장검도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당시 전남도경에서 발표한 치안상황은 다음과 같다.

1950년과 1951년 두해에 걸쳐 군과 긴밀한 협조 하에 전남 도내의 깊은 산과 높은 산악지대에 은거한 빨치산 토벌작전을 단행해 적 사살 2만5959명, 생포 4379명, 귀순 및 자수자 2만3279명, 각종 화기 3917정 노획 등의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 1952년도에는 사살 2621명, 생포 440명, 귀순 430명, 각종 총기 1181정 노획. 1953년에는 사살 168명, 생포 79명, 귀순 28명, 각종 총기류 188정 노획. 1954년에는 사살 29명, 생포 28명, 귀순 10명, 각종 총기류 47정 노획. 1955년에는 전남도당위원장 박갑출 일당을 완전 섬멸, 사살 11명, 생포 4명, 귀순자 2명, 총기 2정 노획. 전남도경찰국은 종합적으로는 적 사살 2만8778명, 생포 4930명, 귀순자 2만3749명, 각종 총기 5345정 노획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전투에서 순국한 경찰관은 전라남도경찰국 2512명과 서전사(西戰司)272명, 기타 등 모두 2799명의 고귀한 희생자를 냈다. 이중에는 담양경찰서 강영원 외 174명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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