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기억속에서도 사라져 가는 문화 산물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자 소비의 장이었던 곳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현존하는 곳이 있다.

70~80년대 지역농협에서 운영하던 연쇄점도 이제는 하나로마트로 이름을 바꾼지 오래 이고 6070년대 담양읍에서 성업하던 칠칠상회, 럭키상회, 태양상회 들도 세월의 변천사에 따라 슈퍼와 마트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져갔다. 

마트, 슈퍼, 편의점과는 달리 이름부터 생소한 구판장이 그것.

구판장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생활 물품을 구매하여 동네 주민들에게 저렴하게 판매하는 곳을 말한다.(구판장의 구(購)는 사다, 판(販)은 판다는 뜻)

광주시는 물론이고 이제는 面 중심지까지 대형마트가 진출한 요즘 세상에 구판장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70~80년대 각 마을마다 있었던 구판장은 동네 사람들이 쓸 생필품을 부녀회원이 돌아가며 판매했던 마을 점방이다. 

5일장에 나가야 생활용품을 장만할 수 있었던 옛 시절, 5일은 기본이고 기다리는 것도 모자라 하루에 두 번 오는 버스에 쉽게 나갈 용기조차 나지 않던 때가 있었다.

이 같은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마을마다 구판장이 있었는데 공동으로 물품을 구매한 뒤 동네 주민들에게 저렴하게 판매해 편의를 도왔다. 

시간이 흐른지라 이젠 사라졌을 법한 구판장이 무정면 오룡리와 고정리에 역사 유물처럼 자리를 잡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오룡 구판장’, “고정 구판장‘이라는 이름처럼 오룡마을와 고정마을 주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필요한 것들을 판매하는 지금의 편의점 같은 공간이다. 

한 때 잘나가던 오룡 구판장의 경우 운영을 하기 위해 당시에도 거금인 1600만원을 마을에 내놓고 운용할 정도로 화수분같은 존재였지만 인구감소와 교통발달, 유통의 변화에 떠 밀려 이제는 낡은 간판만이 당시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다.


* 구판장엔 특별함이 있다

구판장은 마을 단위에서 생활용품 등을 공동으로 구입해 싸게 파는 곳으로 교통수단이 덜 발달 됐던 시절, 각 마을에 한 곳씩은 존재했을 만큼 보편화된 소비장소였다. 

그러나 자가용과 같은 교통수단이 널리 보급되고 마트 등 대형매장이 생활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구판장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 대부분의 구판장들은 문을 닫은지 오래이다. 

가장 최근까지 운영됐던 무정 오룡 구판장과 고정 구판장의 경우 진열대와 냉장고, 낡은 벽들이 보이고 방금 전까지 동네 어르신들이 막걸리를 주고받았을 것 같은 탁자가 놓여있다. 전형적인 ‘구멍 가게’ 모습이다.  

 “한 때는 이곳을 이용하는 주민들이 참 많았어요. 술 먹는 사람들로 북적거릴 때도 있었죠. 자금순환이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외상장사’도 참 많이 했었습니다.” 

마을 구판장을 운영한 이들의 공통적으로 겪은 과거사이다. 

이제는 사라져간 구판장에 가면 간단한 종류의 생필품과 음료수 빙과가 있다. 살 수 있는 물건의 종류도 마트나 편의점처럼 다양하지는 못하다. 

그러나 어려웠던 시절 옹기종기 모여 막걸리 한잔 들이키며 정을 나눴던 기억과 냉장고에서 갓 꺼낸 아이스크림 하나에도 행복해했던 많은 사람들의 어린 시절 모습을 구판장에서는 보다 쉽게 떠올릴 수 있다. 
 
* 사라진 추억속의 시골마을 가게 구판장

요즈음 시골마을에 가보면 100여호 이상 가는 큰 마을이 아니면 잡화를 파는 가게가 없다. 

산업화 과정에서 시골마을 사람들 대다수가 도회지로 떠나버려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수십명에 불과한데다 교통이 좋아져 필요한 물품을 시내에 나가 사다 쓰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과 달리 태어난 마을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제비새끼 까듯 자식을 6~8명씩 낳아 기르던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교통이 불편하다보니 읍내에 서는 오일장에 장보러 가는 날 빼고는 마을 사람들이 필요한 물품을 사다 파는 마을 가게에서 사서 쓰곤 하였다.

구멍가게라고 할 수 있는 구판장은 수십호 정도 되는 보통 마을은 한곳, 100여호 이상 되는 큰 마을은 많게는 2~3곳씩 운영되고 있었다. 이와같은 마을 가게는 새마을 사업 이전에는 점빵으로 불렸었다.

시골마을 구판장은 명색이 가게라고 하지만 보잘 게 없었다. 읍내에 있는 가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니 가게라고 볼 수도 없는 시늉만 낸 가게였다.

그러니 파는 물건이 많을 리가 없었다. 겨우 몇 가지에 불과했다. 빨래비누, 국수, 사카린, 사카린처럼 단맛을 내는 당원, 비닐봉지에 땅콩 몇개와 멸치 대여섯마리를 넣은 술안주, 신선로 그림이 그려진 미원 몇 봉지, 바늘, 실, 머리핀, 참빗 정도였다.

담뱃집을 겸하고 있으면 '아리랑' 궐련담배 몇 갑에 말아 피우는 풍년초를 쌓아 놓은 정도였다. 이외에 동글동글한 하얀 독사탕(돌사탕)과 비과,캬라멜, 일본말로 '덴뿌라'라라고 부르던 꽈배기 정도를 아이들 간식용으로 팔았다.


* 구판장 주력 상품은 막걸리

구판장의 주력 상품은 누락 뭐라 해도 막걸리를 빼놓을 수 없다.

구판장 한쪽에는 주로 간장 담글 때 사용하는 대형 옹기 항아리가 놓여 있다. 막걸리를 담아 놓은 술독이다. 주로 한개가 보통이지만 술꾼이 많은 마을은 술독이 두개가 놓여 있는 곳도 있었단다.

막걸리는 면 소재지 마을에 있는 막걸리 도가집에서 만들어 아침 일찍 배달해 준다. 당시에는 시골에 자가용은 물론이고 소형 화물차도 전혀 없던 때라 막걸리를 짐발 자전거를 이용하여 직원으로 고용된 배달부가 배달해 주었다.

술이 가득 채워진 술 통들은 서너곳 짐발 자전거에 싣고 비포장 자갈길 신작로를 달려  배달부가 도착할 때쯤이면 구판장 앞에는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나 파르스름한 빛깔이 도는 한 되짜리 유리 됫병을 든 아주머니나 아이들이 모여서 기다린다.

술을 좋아하는 남편, 아버지 술 심부름을 나왔거나 그날 농사일 하러 온 놉(일꾼)들 새참과 점심 반주용 막걸리를 받아 가기 위해서다.

아침에 갓 배달된 막걸리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냉장고가 없던 시대라 하루 전 팔다 남은 막걸리나 배달된 지 몇 시간 지난 막걸리는 신맛이 나기 때문에 모두들 그날 쓸 막걸리는 대부분 아침 일찍 사간다.    

막걸리 배달부 아저씨가 주문한 막걸리 통을 내려놓으면 알싸한 막걸리 냄새를 가게 안에 피어 올리면서 콸콸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술을 다 붓고 나면 주인은 항아리 속에 넣어 휘휘 저어 저은 뒤 조금 떠서 맛을 본 다음 순서대로 주문한 양만큼 퍼서 들고 온 주전자에 담아 주거나 유리병에 양철 깔대기를 꽂아 부어준다.

막걸리 값은 곧바로 현금으로 돈을 내는 경우는 드물었고 외상이 많았다. 외상인 경우에는 나무기둥에 끈을 꿰어 매달아 놓은 공책으로 된 치부책 외상장부에 택호별로 적어 놓았다가 보리타작이 끝나거나 쌀방아를 찧고 나면 현물이나 돈으로 받았다.

시대가 변하면서 막거리의 뒤를 이어 맥주와 소주에게 바통을 이어줬지만 오랜 시간 애주가들은 구판장에서 술잔과 긴 호흡을 했다.


* 마을의 소통 공간 

이처럼 구판장은 막걸리, 담배, 국수를 파는 것 말고도 마을 내 소통의 중간자 역할도 톡톡히 하였다.
 
요즈음에는 마을마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회관이 없는 마을이 없지만 그때만 하여도 회관이 있는 마을은 거의 없었다.

마을회의를 할 경우에는 잘사는 집 사랑채나 제각 등을 이용하였다. 여름에는 마을 정자나무라 불렀던 느티나무나 팽나무 고목 아래 돌을 의자삼아 깔고 앉아 이장이 면에서 지시한 사항을 전달한 후 말 빨깨나 하는 몇 사람이 침을 튀기면 말 주변 없는 쑥맥들은 그저 하염없이 듣는 식으로 진행했다.

또한 외지에서 마을에 사람이 오게 되면 구판장을 찾게 되다보니 찾는 집을 안내하고 물건이나 편지를 맡겨 놓으면 가져다 주기도 하고 마을소개까지 도맡아 하는 홍보역할을 전담했다.

드물게 이웃 간에 말다툼을 벌이거나 싸우면 달려가서 말리고 면 서기나 지서 순경이 마을 지도 방문차 들르면 부지런을 떨던 풍경도 이제는 추억 속에서도 아련한 문화 산물로 남았다./정종대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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