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 밀리환초 학살사건 故김기만 씨, 80년만에 유족 찾아
“삼촌이 내가 옆집 사는 일곱 살 형만치 크면 온다고 했는데… 남양군도에서 잘살고 있는갑다 생각했지”
담양읍 객사리에서 죽녹원 떡방앗간을 운영하는 아들 김해운(담양읍교회 장로)씨 내외와 함께 살고 있는 김귀남(86) 씨는 80여년이 지나서야 막내삼촌 김기만 씨의 사망소식을 접했다.
故김기만 씨는 태평양 전쟁 말기 남태평양 밀리환초 강제동원 조선인 학살사건에서 일제의 식인만행에 저항하다 붙잡혀 강요로 자살한 피해자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을 연구해온 역사학자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씨가 광주시의회에서 가진 강제동원 조선인 밀리환초 체르본섬에서의 저항과 학살 기자회견에서 “1973년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제공한 피징용 사망자 연명부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분류한 결과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밀리환초에서 숨진 조선인이 총 218명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며 사망자의 이름과 출신지, 출생연도 등을 공개했다.
이 가운데 214명은 전남 출신으로 특히 사망자 55명 가운데 25명(총살 11명, 강요에 의한 자살 14명)이 담양 출신 희생자였다.
‘해군군속신상조사표’에는 이름, 출생날짜, 사망날짜(1945년 3월), 친권자, 본적지 등이 적혀있는데 자료명부 번호 426번 ‘金山基萬’으로 창씨개명된 김기만 씨도 이때 일본 진압군에 의해 사망(1945.3.18)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2년 3월 고향을 떠난 지 꼭 3년 만이자 스물두살 짧은 생은 그렇게 비참하게 끝났다. 자사(自死)라고 기록돼 있는 것을 보면 일본군과의 격전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기만 씨는 1923년생으로 담양읍 객사리 244번지 구. 담양객사 옆 초가집에서 아버지 김광오 씨와 어머니 이약임 씨 슬하에서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갓 스물이 되던 1942년 3월 2일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징집돼 남태평양의 밀리환초로 끌려갔다.
할머니(이약임씨)와 함께 살던 장손 김귀남 씨는 “그 시절에는 모집이라고 무조건 데려갔다고 해요. 그런데 간 사람만 있제 온 사람은 아예 없어. 온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이라도 들었을텐데…”
갓 스무살이 된 가정도 꾸리지 못한 막내아들이 징용에 끌려간 뒤 할머니는 소식도 없는 아들을 애타게 기다렸다고 한다.
“징용에 끌려간 뒤 1년 다 돼서 편지가 두어 번 왔었나봐요. 잘 있다고. 편지에 남양군도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지 시골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그 뒤로 소식이 뚝 끊어지고 말았죠.”
해방이 되면 돌아올 줄 알았던 아들이 기별이 없자 할머니는 ‘거기가 살기 좋으니까 결혼해서 거기서 사는 모양’이라고 했다.
김씨는 “삼촌이 보내왔던가 어디서 보내왔던가는 잘 모르겠는데 언젠가 일본 돈이 왔었나봐요. 해방되고 아주 오래전에 일본 돈을 한국 돈으로 바꿔주는 화폐교환이 한 번 있었는데 할머니는 아들 돌아오면 쓴다고 교환도 하지 않고 꽉 감추고 있다가 돌아가셨죠”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흑백사진도 흔치 않던 시절,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나이에 끌려가다보니 돌아가신 할머니와 그의 형제들 외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지금은 객사리 초가집에서 함께 살던 어린 손자에게 막내아들을 그리워하며 이야기해주던 할머니의 중얼거림만이 귀남 씨의 기억에 남아있을 뿐이다.
87세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치매가 심해졌는데도 불구하고 “막내가 곧 돌아온다고 했는디”라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했다.
호적초본에는 김기만 씨의 사망신고도 되어있지 않았다.
“혹시라도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제사를 지낼 수도 없고 사망신고를 할 수도 없었죠.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아야 사망신고를 하던지 뭐를 하던지 할텐데 조금 더 기다려본다고 한 것이 지금까지 와 버렸죠…”
김씨는 이제는 삼촌을 기억하는 사람이 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일본인 학자가 나서서 삼촌의 흔적을 찾아 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감추지 않았다.
일본인 강제동원 연구자 다케우치 씨는 “1945년 3월 사건은 밀리환초에서 담양출신 강제동원자를 중심으로 벌어진 항일투쟁이었다”며 “담양의 청년들이 저항의 주축이 되었는지도 새로운 연구의 주제”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밀리환초 희생자 대부분이 20대 청년들로 자식이 없고 형제자매가 대부분 작고해 강제징용 진상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담양에서 유족과의 첫 만남은 밀리환초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연구에 대한 각오를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일본인 강제동원 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씨에 의해 집중조명된 ‘남태평양 밀리환초 조선인 학살사건’은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5년 2월 미군에 의해 해상이 봉쇄되면서 식량 등 보급물자가 끊기자 일본군은 조선인 군속과 일본군을 몇몇 섬에 분산시켜 자력갱생토록 했다.
극한 상황이 지속되던 어느 날 일본인을 따라간 조선인 한 명이 증발하듯 사라졌고 그 후 조선인 몇 명이 그 시체를 발견했는데 허벅지살이 포를 뜬 것처럼 도려내져 있었다.
인육을 고래고기로 속여 나눠주려했던 사실이 밝혀지자 “일본인에게 잡아먹히나, 굶어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며 담양 출신 군속들을 중심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일본군 7명을 죽이고 체르본섬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인근 섬에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담양출신 25명을 포함한 주동자 55명이 사살되거나 자결했고 68명만이 헤엄쳐 표류하다 1945년 3월 18일 미군함정에 극적으로 구조된 사건이다. /김고은 記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