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절제와 비움의 미학, 은각사에서 배우다
■ 와비사비의 미학, 비움과 연결의 정원
‘와비사비’는 일본 전통 미학을 대표하는 개념이다.
불완전함·소박함·고요함 속에서 찾는 아름다움을 뜻하며 화려한 치장보다 세월이 남긴 흔적과 덧없음 속에서 가치를 발견한다.
선종사상과 다도문화에서 비롯되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를 강조한다.
교토 동부 산기슭에 자리한 은각사는 일본 정원문화에서 와비사비 미학을 정원과 건축 속에 구현한 대표적 공간이다.
1482년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별장으로 조성한 뒤 선종 사찰로 전환되었으며 금빛 찬란한 금각사와는 달리 절제와 고요의 미를 추구한다. 화려함을 배제하고 불완전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은각사는 일본 정원의 철학적 깊이를 잘 보여주는 장소다.
■ 일본사찰문화를 드러낸 입장권
정문에서 건네받은 입장권은 단순한 티켓이 아니다.
흰 종이에 붉은 인장이 찍힌 부적형태로 가내안전(家內安全), 개운초복(開運初福) 등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안내문은 이를 현관에 걸어두라고 설명한다. 일본사찰문화에서 입장권은 관람요금이 아니라 신앙적 봉납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은각사의 관람은 입장과 동시에 종교적 체험으로 확장되며 단순한 관광을 넘어선 성찰적 경험을 예고한다.
관람객들은 경내에서 고슈인(사찰도장)을 받아간다. 은각사에서는 입구 옆 고슈인소에 노트를 맡기면 관람을 마친 후 출구에서 되돌려받는다. 300~500엔의 봉납으로 인장과 서예를 받아가 ‘구매’가 아닌 ‘신앙적 봉납의 표시’로 여겨진다.
또한 사찰 내 판매대에서는 다양한 오마모리(수호부적)가 제공된다.
시험합격, 건강, 교통안전 등 현대인의 바람을 담은 부적은 은각사가 단순한 역사 유적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생활 속 신앙의 공간임을 보여준다.
■ 가레산스이 정원양식과 회유식 정원
정원에 들어서면 모래와 돌로 구성된 은사단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원뿔형 모래 언덕은 달빛을 반사하는 산을 정갈히 빗질된 모래밭은 잔잔한 파도와 흐름을 상징한다. 이는 일본 정원의 대표적 양식인 가레산스이(故山水 ‘마른풍경’)의 전형이다.
가레산스이는 물을 사용하지 않고 돌과 모래로 산과 바다를 축소·상징화한다. 실제로는 고요하지만 보는 이의 마음속에 거대한 자연을 떠올리게 만든다.
은각사의 정원은 연못과 건물을 중심으로 한 회유식 정원이다. 정해진 동선을 따라 숲을을 오르면 시선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모래정원을 지나면 발밑을 덮은 초록빛 이끼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은각사의 이끼정원은 인위적으로 가꾼 화려한 경관이 아니라 세월이 만든 자연의 흔적이다. 축축한 공기와 어우러진 녹색 융단은 정원의 고요함을 완성하는 핵심요소다.
일본정원에서 이끼는 와비사비의 상징으로 화려한 장식 대신 시간의 깊이를 드러내며 관람객에게 덧없음 속의 아름다움을 체감하게 한다.
연못과 건물을 지나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시선이 바뀔 때마다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특히 숲을 한바퀴 도는 듯한 동선은 ‘보는 정원’이 아닌 ‘걷고 체험하는 공간’임을 실감케 한다.
숲길을 따라 걷다 마지막에 마주하는 교토시내 조망은 주변 풍경을 정원의 일부로 끌어들인 전형적 차경이다.
일본 정원에서 차경은 원래 웅장한 산세나 자연 경관을 끌어들이는 기법으로 알려져 있지만 은각사의 차경은 도시의 일상 풍경을 담담히 수용하는 수준에 머문다. 이는 화려한 차경연출이 아니라 소박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주변을 품어내는 와비사비의 미학과 맞닿아 있다.
■ 정원을 넘어 이어지는 길
정원산책을 마치고 은각사 문을 나서면 자연스럽게 철학자의 길로 이어진다. 교토대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사색하며 걸었다는 이 길은 작은 운하를 따라 벚나무가 늘어선 조용한 산책로다. 은각사에서 시작된 사색의 여정이 도시 일정으로 확장되는 구조다.
담양에도 이와 닮은 흐름이 있다. 죽녹원을 나서면 관방제림으로 이어진다. 대숲의 고요함과 강변 고목 숲길이 하나로 이어지는 경험은 은각사에서 철학자의 길로 나서는 체험과 닮아있다.
정원이 울타리 안에 갖히지 않고 일상과 호흡하는 산책로로 확장될 때 가치가 배가 된 것이다.
교토 은각사는 와비사비의 미학을 구현한 대표적 정원이다.
부적형 입장권에서 시작해 고슈인과 오마모리로 이어지는 체험, 회유식 정원 산책과 차경, 이끼 정원의 고요함, 그리고 철학자의 길까지 관람은 단순한 구경이 아니라 성찰과 일상의 연속성으로 이어진다.
죽녹원이 국가정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도 시설확장이 아니다.
은각사가 보여준 것처럼 정원의 진정한 가치는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비움으로 채우는 정원, 시간과 자연의 흔적을 존중하는 정원, 죽녹원에서 관방제림으로 이어지는 일상적 동선까지 품어내는 연결의 정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고은·김지헌 記者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